[더코리아-광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권력은 이제 시장에 넘어간 것 같다”(2005년 5월 16일). 이 발언의 취지는 정부는 시장을 공정하게 관리할 뿐,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은 시장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대상을 반영하듯 '시장'을 '재벌', 그중에서도 특히 '삼성'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많았다.
이재용 부사장에 대한 항소심 판결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든 것은 나뿐일까. 아버지 시절엔 박정희가 이병철 보다 훨씬 셌는지 몰라도, 박근혜가 이재용을 쥐락펴락 할 수 있었을까? 과연 이 사건은 "박 전 대통령이 국내 최대 기업집단인 삼성그룹의 경영진을 겁박"하였고 이재용 부사장은 "박 전 대통령과 최서원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그런 성격인가?
박정희 시절에 '경'(經)이 '정'(政)에 꼼짝 못했던 것은 맞는 것 같다. 물론 이 때조차도 삼성이 피해자이기만 했던 건 아니다.
박정희는 1961년 쿠데타로 권력을 쥔 뒤 다른 모든 부정축재 기업주들을 구속했다. 이병철 회장만 예외였다. 쿠데타가 벌어질 때 동경에 있었던 그는 귀국을 하여 박정희와 담판을 벌여 다른 기업주들까지 석방하도록 했다. 많은 얘기가 오간 이후 박정희 정권과 이병철 회장은 '정경유착'이 아니라 '정경복합체' 수준의 행태를 보였다. 박정희 정권과 삼성이 짜고 벌인 사카린 밀수 사건 같은 게 대표적이다. 박정희-이병철 '정경복합체'가 시장 경제 질서를 문란케 한 이 사건을 언론이 폭로했는데 이병철 회장은 구속도 되지 않았다.
지금껏 삼성 권력이 가장 막강했던 건 이건희 회장 때가 아닌가 싶다. 참여정부 초기 가장 핵심적인 경제부처였던 정보통신부 장관엔 삼성전자 사장 출신의 진대제 씨가 앉았다. 대한민국 성장동력의 핵심축이었던 IT를 삼성에 맡긴 격이다. 2000년대 중반, 내가 법무부장관을 할 때까지도 삼성엔 압수수색 한 번이 없었다. 반면 재계 2위였던 현대자동차의 정몽구 회장은 삼성과 엇비슷한 비자금 조성 혐의로 구속이 됐다.
삼성만은 예외였다.
이재용 부회장이 270조원 규모의 삼성그룹을 60억 원 증여로 물려받고 16억 원의 세금을 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는 게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증여다. 이 사건은 대법원에서 무죄판결까지 받았다. 나도 법조인이지만 이 무죄판결 전까지도 조금은 안이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도 대한민국 국가기관 중에서 대법원은 재벌의 '로비'로부터 자유로운 곳 아니냐고 말이다. 2009년 대법 판결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대법원도 삼성의 로비만큼은 통한다!
삼성은 다른 재벌과는 다르다. 재벌 중에서도 재벌, 급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검찰도 압수수색을 못 하니 수사랍시고 인터넷을 뒤져야 하는 대상이 삼성이었다. 삼성 압수수색은 2008년 조준웅 특검이 처음 했다. 그렇지만 요란한 겉모습과 달리, 결국 삼성의 불법 상속과 비자금 조성 혐의에 면죄부만 줬다. 특검은 삼성의 주장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나는 삼성공화국이라는 말도 정확하지 않다고 본다. 삼성왕국? 삼성제국? 그들의 힘은 갈수록 더 커진다. 경제 내부에서도 여러 문제가 많지만 그 뿐이 아니다. 그들의 힘은 정치를 비롯해 사회 모든 분야를 쥐락펴락 하고 있다.
촛불국민혁명 이후에 이재용 부회장이 수감되면서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이젠 법치국가의 자존심을 좀 세울 수 있을지 모른다고.
아니나 다를까. 이재용 부회장이 집행유예로 나왔다는 소식에, 아직도 한국의 법은 삼성을 이겨낼 수가 없구나 하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경제권력의 황제와 정치권력의 정상이 비공개리에 만났는데 거기서 점잖지 못하게 “명시적 청탁”과 “명시적 뇌물 요구”를 교환하겠는가? 그런 일들은 경제권력의 황제 쪽에선 그 신하들과, 정치권력의 정상 쪽에선 수석비서관과 장관 같은 사람들 사이에 구체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이게 현실세계다. 박근혜가 "나에게 100억 원만 주시오. 내가 도와줄게" 하면, 이재용이 "알았소. 돈을 보낼 테니 승계를 도와주시오" 이렇게 말하겠는가. 이랬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그들이 만나기 전후에 안종범이 박근혜의 지시를 받았고 문형표 등이 국민연금에 압력을 넣고 후려친 것이 합리적 증거 아닌가. 하물며 살인범도 직접적인 자백이 없더라도 과학적인 수사 결과에 의해 처벌을 받건만.
경영권 승계 작업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는 발상도 신기하다. 삼성은 이미 90년대 말부터 3세 경영권 승계에 총력을 쏟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의 각종 로비가 지배력 강화엔 도움이 됐지만 경영권 승계 목적은 없었다는 논리는 삼성이 바보라는 것인가, 아니면 국민을 바보로 취급하는 것인가.
이재용 부회장을 1년 가까이 수감한 것으로도 사법정의가 많이 세워졌다고 위안 삼아야 하는 것일까. 삼성에 굴복한 법의 권위를 되찾는 것이 이렇게도 어려운가. 대법원 판결을 한번 기다려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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