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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애민 정신, 한글을 만들고 과학을 꽃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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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세종의 애민 정신, 한글을 만들고 과학을 꽃피우다

[조선왕릉⑧] 여주 영릉

 

여주시 세종대왕면 왕대리에 위치한 영릉은 한글을 창제한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그의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세종 영릉 능침 측면 항공사진.

여주시 세종대왕면 왕대리에 위치한 영릉은 한글을 창제한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그의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세종 영릉 능침 측면 항공사진.  ⓒ 문화재청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여주시 세종대왕면 왕대리에 위치한 영릉은 한글을 창제한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그의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이 능은 조선 역사상 최초의 합장릉으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췄다. 무덤 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 세정의 민본 정치, 조선시대의 큰 번영으로 이어지다

세종은 1397년(태조 6) 조선 3대 임금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418년(태종 18)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됨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같은 해에 22세의 나이로 조선 4대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세종대왕은 54세로 승하할 때까지 31년 6개월의 재위 기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을 설치하여 유망한 인재를 양성하고, 학문을 진흥하여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와 제도를 정비하였다.

민본 정치를 중요시하였는데, 당대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는 훈민정음의 창제 역시 백성들과의 소통을 바라던 세종의 고민이 낳은 산물이었다. 유교 정치와 자주적인 문화의 융성을 통하여 조선시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큰 번영을 가져왔다.

특히 세종이 창제한 한글은 현대의 대한민국과 북한의 공용문자로 지정되어 통용되고 있으며 세종 시대에 확립된 북방의 국경은 그대로 한반도 이북 지역의 국경으로 자리 잡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왕립 연구기관인 집현전의 학자들은 훈민정음 창제, 과학 기술 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종의 행보에 힘을 실어 주었다.

왕립 연구기관인 집현전의 학자들은 훈민정음 창제, 과학 기술 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종의 행보에 힘을 실어 주었다.  ⓒ 문화재청




■ 왕립 연구기관 ‘집현전’ 설치…유망한 인재 양성

세종은 재위한 이듬해에 집현전을 만들어 많은 신진 학자들을 양성했다. 왕립 연구기관인 집현전의 학자들은 훈민정음 창제, 과학 기술 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종의 행보에 힘을 실어 주었다.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의 각별한 관계에 대한 일화는 지금도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어느 날 세종이 밤늦도록 책을 읽다가 집현전에 불이 켜져있는 것을 보고 내시로 하여금 누가 밤늦도록 집현전에서 책을 읽고 있는지 보고오라 명하였다. 이에 내시는 신숙주가 홀로 독서하고 있다 아뢰었다. 세종은 그 말을 듣고 친히 집현전에 나가 그 광경을 살폈으나, 신숙주는 세종이 온 것을 모르고 계속 독서에 열중하였다.

세종은 새벽이 되도록 밖에서 글 읽는 소리를 경청하다 신숙주가 고단하여 책을 읽다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고 추운 날씨에 독서에 열중한 신하에게 자신의 어의를 벗어 덮어주고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깨어난 신숙주가 자신의 등에 씌워진 어의를 보고서야 전날 밤 왕이 행차하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감복하여 왕의 침전을 향해 절을 하였으며 더욱더 학문연구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 조선시대 내내 사상 최고의 왕비로 칭송받은 소헌왕후

소헌왕후는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로 1395년(태조 4)에 태어났다.

1408년(태종 8)에 충녕대군(훗날 세종)과 가례를 올리고 경숙옹주에 봉해졌다. 1417년(태종 17)에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졌으며, 충녕대군이 1418년(태종 18) 세자에 책봉되자 이와 함께 경빈(敬嬪)에 진봉되었다가 세종의 즉위와 함께 공비가 되었다. 그러나 중전에게 이러한 이름을 붙이는 예가 없다고 하여 1432년(세종 14)에 왕비로 승봉(陞封)됐다.

아버지 심온이 역적으로 몰려 한때 왕후의 지위가 위태로웠다. 심온이 영의정에 올라 명나라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의 아우 심정이 병조판서 박습에게 군국의 대사를 상왕인 태종이 처리하는데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였는데, 박습이 이를 왕실에 고자질하여 심온과 심정이 모두 사사되었다.

이때 소헌왕후도 폐위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으나 세종을 내조한 공이 컸으므로 무사하였다. 슬하에는 8남 2녀를 두었는데, 문종과 세조가 소헌왕후의 소생이다.

세종과 소헌왕후는 매우 금실이 좋은 부부였다고 알려져 있다. 1446년(세종 28)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매우 슬퍼하며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에게 부처님과 그 가족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이를 한글로 번역해 책을 내라고 지시했다.

이에 수양대군이 김수온 등의 도움을 받아 <석가보>, <법화경> 등에서 일부를 발췌하고 이를 한글로 옮겨 <석보상절>을 편찬했다. 30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에 문헌 자체의 내용만으로도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영릉은 1446년(세종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며,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했다.

영릉은 1446년(세종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며,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했다.  ⓒ 문화재청




■ 조선의 역대 왕릉에서 마지막으로 신도비가 세워진 ‘영릉’

영릉은 1446년(세종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며,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했다.

세조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여주로 옮겨 왔다. 원래의 영릉 터에 있었던 상석,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수, 신도비 등은 그 자리에 묻혔다.

영릉은 한국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왕의 묘역답게 능역도 크게 해 놓았고, 기념관이나 세종대왕이 집권하던 시기의 과학 문물들도 많이 전시해 놓았으며, 오늘날에도 견학하는 사람들로 크게 붐비고 있다. 대개의 조선왕릉과는 달리 능침 앞까지 올라가서 관람할 수 있는데, 헌릉처럼 계단이 따로 있다.

세종대왕의 영릉은 조선의 역대 왕릉에서 마지막으로 신도비(일종의 추모비)가 세워진 능이기도 하다. 조선의 왕릉에서 신도비가 세워진 능은 건원릉(태조), 후릉(정종), 헌릉(태종)과 영릉뿐이고 그 이후의 왕들은 신도비가 없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영릉 근처에는 후손인 효종과 왕비인 인선왕후의 영릉(寧陵)이 있다. 그래서 두 묘역을 합쳐 영녕릉(英寧陵)이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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