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에서 30년대로 이어지는 시기의 목포는 일제의 수탈과 폭정이 계속되고 가난과 굴욕이 사람들의 가슴을 옥죄던 도시였다. 한국 최초의 여류소설가로 불리는 박화성의 작품 속에는 그 당시 목포와 목포 사람들의 생활상이 섬세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문장으로 그려져 있다. <추석전야>와 <하수도공사>, 두 편의 소설을 따라가는 여행길이다. 주인공들이 걸었을 거리와 작품의 배경 속을 거닐어보자.
소설 <추석전야>를 만나다
섬으로 떠나려는 계획이 없어도 목포를 여행하려는 사람이라면 국제여객선터미널 4층으로 가자. 널찍한 갤러리를 통과하면 탁 트인 야외공간이 펼쳐진다. 손을 뻗으면 미끄러지듯 항구로 들어오는 배의 머리에 닿을 듯하고, 무심히 뒤를 돌아보면 유달산과 삼학도 사이에 자리한 구도심이 와락 안겨든다. 이제 저 안으로 들어간다. 첫 만남이란 언제나 가슴 떨리는 일이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국제여객선터미널에서 나와 왼편으로 길을 잡으면 선창가가 이어진다. 이 길을 따라 박화성의 단편소설 <추석전야> 속을 걸어본다.
<추석전야>의 줄거리는 이렇다. 3년 전 남편을 잃은 영신은 방직공장에 다니며 홀시어머니와 남매를 힘들게 부양하고 있다. 추석을 앞두고 시어머니에게는 새 옷을 한 벌 지어드리고 싶고, 딸에게는 댕기를, 아들에게는 대님을 사주고 싶다. 그러나 당장 밀린 집세를 내지 못해 거리로 쫓겨날 판이고, 어린 여공에게 추태를 일삼는 공장장과 싸우다 어깨에 부상까지 당한다. 몇날 밤을 꼬박 새며 삯바느질을 해 추석을 쇨 꿈에 부풀지만 결국 집세로 써버리고 은전 몇 닢만 남는다.
재봉틀 북에 어깨를 찔린 영신이 터덜터덜 걸어 집으로 향하던 길이 바로 이곳 선창가다. <추석전야>에는 하루 종일 기름 냄새와 면화 먼지 속에서 일했던 영신이 퇴근 후 탁 트인 해안을 바라보며 한숨 돌리는 정경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선창가의 생선들과 쌓아놓은 과일더미를 바라보며 집에서 배를 곯고 있을 가족들 생각에 발길을 재촉하는 여인의 서글픈 모습도 보여준다.
산업과 상업의 발전으로 돈이 돌고 선창가 주변엔 일본식 요정들이 들어섰는데, 지금도 그때의 요정들이 적산가옥으로 남아 있다. 선창가에서 오르막길을 따라 걸으면 서산동으로 이어진다. 작은 종이상자를 붙여놓은 듯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이 마치 물결처럼 바다로 향해 있다. 득세하는 일본인들에게 밀려나 유달산 자락에 겨우 발을 붙인 사람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기쁨과 눈물이, 희망과 한숨이 교차하던 이곳은 하루하루 밥벌이를 위해 중노동에 시달렸던 이들이 돌아와 몸을 누이던 한 뼘의 꿈이었다. 영신도 이곳에서 죽은 남편의 다정했던 모습을 추억하며 살아갔다.
주인공 영신처럼 고달픈 생활을 이어가야 했던 여인들의 모습을 목포근대역사관에서 사진으로 만날 수 있다.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전의 목포 풍경과 그후의 변화 과정들을 자세히 기록한 사진들도 전시되어 있다. 목포근대역사관은 르네상스식으로 지어진 2층 건물로, 일제 수탈의 상징인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일대에 남아 있는 적산가옥들도 볼 수 있다.
<하수도공사>의 현장을 가다
목포근대역사관에서 나와 유달산을 향해 서면 언덕길 옆으로 붉은 벽돌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옛 일본영사관 건물이다. 이곳은 박화성의 작품 중 역작으로 꼽히는 <하수도공사>의 첫 번째 장면에서 배경이 되었다.
밀린 석 달 치 임금을 받기 위해 유달산의 하수도공사에 참여했던 노동자 300여 명이 경찰서로 몰려간다. 목포부청과 하수도공사를 계약한 중정이라는 자가 공사금액의 4할을 떼먹고 공사를 진행하며 밀린 임금을 주지 않으니 당장 그를 잡아들이라 요구한다. 지금의 초원호텔 자리에 당시 경찰서가 있었고, 목포부청이 옛 일본영사관이다.
경찰서장과 면담하게 된 노동자 대표 중 동권이라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동권은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가 돈이 없어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대신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고 돌아온 지식인이다. 뜻한 바 있어 하수도공사 노동자의 길로 들어서 불합리한 처우와 임금 착취에 항거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실업노동자를 구제한다는 목적으로 시작된 유달산 자락의 하수도공사는 일본인과 그들에게 아부하는 건설업자들의 주머니를 키우는 꼴이 되었다. 일감을 찾아 외지에서 온 노동자들은 함바집 숙식비로 하루 일당을 바쳐야 했고, 그나마도 비가 와서 쉬게 되면 외상을 져야 했다. 작가는 꼼꼼한 취재를 바탕으로 당시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실제 하수도공사는 유달산 자락의 조각공원 부근과 아래쪽 시가지 사이에 하수도를 만드는 대공사였다. 조각공원 앞 도로 건너편으로 이어지는 죽교동 골목을 걸으면 그때 만들어진 하수도관을 볼 수 있다. 끝날 듯 끝날 듯하다가 다시 이어지고 갈라지는 죽교동 골목은 주인공 동권과 그를 사랑하는 용희가 살았음직한 동네다.
“용희는 영창의 미닫이를 열었다. 나비 같은 눈송이가 펄펄 춤추는 듯이 날린다. 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눈발을 쳐다보며 애인이 주고 간 교훈을 생각한다. 눈은 말없이 쌓이고 쌓인다.” - 박화성 <하수도공사> 중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안타깝게 헤어지는 장소였던 용희의 집은 어디였을까? 어깨에 닿을 듯 낮은 담벼락에 붙어 있는 창문은 굳게 닫혀 있다. 빈집이 있어 슬쩍 들여다보니 대문 앞이 바로 부엌이고, 거기서 다시 한 칸 방으로 이어지는 좁디좁은 집이다. 윗집에서 싸움이 나면 아랫집에서 판결을 해줄 정도로 집들이 가깝게 붙어 있다. 이렇게 가까이 붙어사는 것이 ‘목포의 오지랖’을 낳고 인정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죽교동 골목 투어를 마치고 양동길로 접어든다. 서양 사람들이 많이 살아 ‘양동’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길에는 작가 박화성이 다녔던 정명여중고가 있다. 선교사 유진벨이 정명여학교라는 이름으로 설립한 목포시 최초의 여성 전문 교육기관이다.
선교사 사택으로 쓰였던 석조 건물이 등록문화재 제62호로 지정되어 지금은 학생들의 음악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작가 박화성이 살았던 곳은 도로가 나면서 모두 사라졌고, 생가터로 짐작되는 자리에서 가까운 어느 건물의 입구에 표지석만 세워져 있다. 아는 사람이 아니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자리여서 안타까움이 크다.
갓바위문화타운의 목포문학관에 박화성관이 마련되어 있어 그녀의 생애를 좀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거친 시대를 살아야 했던 작가의 인생과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곳으로, 다양한 자료와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여행정보
주변 음식점
-장터 : 꽃게무침 / 전라남도 목포시 영산로 40번길 23 / 061-244-8880
-영란횟집 : 민어회 / 전라남도 목포시 번화로 47 / 061-243-7311
-한일식당 : 청국장 / 전라남도 목포시 영산로40번길 26-6 / 061-243-9040
-쑥꿀레 : 쑥꿀레 / 전라남도 목포시 영산로59번길 43-1 / 061-244-7912
숙소
-목포 마리나베이호텔 : 전라남도 목포시 해안로 249 / 061-247-9900
http://marinabayhotel.co.kr/
-목포1935 : 전라남도 목포시 영산로59번길 35-6 / 061-243-1935
http://cafe.daum.net/mokpo1935
글, 사진 : 박성원(여행작가)
※ 위 정보는 2019년 3월에 갱신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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